
9월 이후에 필리핀 쇼핑몰을 방문하면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건물 내부가 치장되어 있는 걸 볼 수 있고 곳곳에서 캐롤이 들리곤 하는데요.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이런 광경을 봤을땐 “엥, 9월에 무슨 크리스마스야? 여긴 크리스마스 날짜가 한국이랑 다른가?” 라고 반응하거나 매우 이상하게 느낄거예요. 한국에서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아무리 일러도 11월 말에서야 시작되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필리핀에서는 일찍이 이 즈음부터 큰 기대감을 갖고 크리스마스를 정성스럽게 준비하는것이 일상이랍니다. 전세계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유독 필리핀 사람들에게 소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필리핀 사람들이 이른 시기부터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이유와 크리스마스가 필리핀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실제로 필리핀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나라입니다.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9월부터 12월인데요, 놀랍게도 무려 일년의 3분의 1을 차지하지요. 9월에 시작되어 12월에 절정에 다다르고 1월에 새해를 맞이한뒤 일주일 이내에 끝납니다. 심지어 쇼핑몰의 경우 빠르게는 8월부터 캐롤을 틀고 늦을땐 크리스마스 트리를 발렌타인 데이인 2월 14일이 지나서야 치운다고 합니다. 이렇게 긴 크리스마스 시즌을 사람들은 버먼스 (Ber Month)라고 부릅니다. 왜 버먼스라고 부르냐고요?
9월(September), 10월(October), 11월(November), 12월(December)
위 기간의 달(月)들을 영어로 번역하면 다들 “ber”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버먼스는 이러한 공통점을 가진 네달을 통틀어 칭하는 용어인데요. 만들어진 과정을 보니 용어의 유래가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네달 동안이나 준비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과거 스페인 지배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많은 필리핀에서 크리스마스가 가장 크고 중요한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1521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서회항로 탐사중에 스페인의 탐험가 마젤란이 세부 섬에 도착하면서 필리핀은 유럽에 알려집니다. 마젤란은 죽기전까지 필리핀에서 열심히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1564년에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지로 선언된 후 시작된 식민통치는 1898년 스페인이 미국에게 전쟁에 패할때까지 무려 300년 이상 계속됐습니다. 그 결과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가톨릭 국가로 전체 인구의 80퍼센트인 6000만명이 카톨릭교도입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미국은 스페인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50년간 필리핀을 식민 통치하는데요. 미국의 영향으로 필리핀내 개신교도 수도 늘어납니다. 필리핀 내 천주교 신자에 개신교 신자까지 합하면 전체 인구의 90-95 퍼센트, 국민의 대부분이 기독교도입니다. 물론 기독교도 국가라고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유독 필리핀에서 크리스마스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신앙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먹고 마시며 즐기는 스페인, 라틴식 축제 & 파티 문화가 자리잡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차분하고 경견하기보다 신나는 축제와 파티의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무더운 필리핀에서 연말이 될수록 기온이 서늘해져 사람들이 활동하기 좋은 점도 한몫하는데요. 덕분에 곳곳에서 유명한 캐롤이 쩌렁쩌렁 울리고 화려한 장식은 물론 초대형 트리가 여기저기 자리잡습니다. 이 시기 사람들은 더욱 활기차며 기대감에 들떠있습니다. 일터, 집 어디서든 파티가 열리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못보던 얼굴을 보며 서로 선물을 주고 받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시기입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단 하루를 바라보고 1년을 산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필리핀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 친척, 친구뿐만 아니라 동료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모두들 화려하고 비싼 장식으로 꾸민 곳에서 파티를 열어 좋은 음식을 나눠 먹고 선물을 주고 받기 위해 1년 동안 번 돈을 한번에 몰아 쓰지요. 사실 필리핀 사람들은 1년내내 저축을 하기보단 생기는 돈을 바로바로 쓰며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소비 패턴을 갖고 있긴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져 돈이 없으면 무리하게 빚을 내서라도 마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연말에 쓸돈을 마련하기 위해 소매치기를 비롯한 강력 범죄가 많이 일어나기도 하니 여행객들은 소지품 관리에 유의하셔야겠습니다.





때문에 이 시기에 사람들의 구매력이 엄청 난데 특히 12월에 쇼핑몰을 가면 평일, 주말, 밤 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건물 안에 사람이 가득해 걷기조차 힘들고 계산대 앞에는 몇십, 백미터나 되는 긴줄이 형성되어 있어 물건 하나를 구매하기도 힘들 정도 입니다. 또 라자다든 쇼피든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도 평소보다 배송이 많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꼭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오프라인 구매든 온라인 구매든 12월 이전에 미리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11월 말부터 쇼핑몰 곳곳에서 대대적인 할인 행사가 열립니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그러하듯 11월과 12월 사이에 필리핀에서도 여러 가게들에서 블랙프라이데이 행사가 진행되니 이점 참고하시고 사람이 없는 시기를 찾아 쇼핑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지출이 많은 시기를 반영하듯 12월에 필리핀 회사에 일하면 직원들은 “13개월 수당”이라는 것을 받는데요. 12월에 급여를 받을때 1개월의 급여분을 보너스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 급여가 무려 2배로 나오는 셈인데요. 이런식으로 필리핀의 많은 일꾼들이 행복한 달을 보낼 수 있습니다. 또한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회사에서 열리는 파티도 중요한데요, 파티가 허접한 경우 이를 이유로 일을 관두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하네요. 때문에 만약 당신이 필리핀에서 사업을 운영한다면 크리스마스 사내 파티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이동량도 확연히 늘어 어딜 가도 차가 많습니다. 세계적으로 교통체증이 심하기로 유명한 마닐라도 크리스마스 당일에 극심한 트레픽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작년에 마닐라를 방문했을때 위 사진에서 처럼 눈앞에 보이는 쇼핑몰을 저 거리에서 두고 몰에 주차를 하기까지 두 세시간이나 걸렸습니다. 마닐라의 교통체증은,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의 교통체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며 그 심각성은 당신이 직접 겪어보시면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마닐라를 한번 가보면 내가 한국에서 지금껏 사는 동안 고작 서울에서의 출퇴근길 트래픽 따위에 왜그리 불평했을까 라고 말하며 한국의 교통 체계에 더욱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당일, 마닐라 베이 워크 (Manila Bay Walk)에서 불꽃 놀이 쇼와 엄청난 인파
크리스마스 시즌엔 도로만 가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도 뿐만 도보를 보면 어딜 가도 사람이 많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당일에 마닐라 베이 워크에서는 불꽃 쇼를 보기 위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습니다. 그 당시 마닐라 베이 뿐만 아니라 다른 어딜 가든 집회 현장과 같은 밀도의 많은 군중이 모여있었습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한 필리핀의 모습을 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특별한지 잘 알아보았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이 날이 중요한 만큼 필리핀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때문에 다음 글에 이어서 크리스마스에 대한 더 많은 내용을 다뤄 볼 건데요. 다음엔 길거리에서 등장하는 화려한 등불 장식 파롤(Parol)과 필리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는 명절을 보내는 방식를 알아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