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사람들이 새해 보내는 방법

지난 글들에서 언급 했듯 길고 세계에서 가장 긴 것으로 유명한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시즌, 즉 버먼스는 새해가 되는 1월까지 계속 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는 9월부터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쁨과 설렘이 넘치고 이러한 정서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당일에 정점을 맞이하지요. 그러니 12월 25일 크리스마스부터 다음 년도 1월 1일 새해까지 이 일주일 남짓 되는 기간이 필리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데요. 어느 나라 못지않게 밝고 활기찬 텐션과 대외적인 활동을 좋아하는 나라지만 이곳엔 아직 가족주의와 대가족 개념이 깊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이곳 사람들은 더욱 가정적이게 되는데요. 일주일 가량 되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들은 보통 휴가를 내고 자신의 소중한 가족들과 밀착하여 오붓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요. 필리핀의 새해가 궁금하신가요? 마침 저에게 현지분들이 새해를 보내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생겼기에 이렇게 글로 적어 소개해보겠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새해 전날 아침에 산책하는 길에 본 광경입니다. 평상시엔 잘 안보이던 나팔을 노상에서 색깔 별로 팔고 있는데요. 이날 아침엔 곳곳에서 나팔과 폭죽을 팔고 있는 걸 볼 수 있답니다. 이 물건들의 쓰임새는 무엇일까요? 필리핀에서 새해 자정이 되면 이 물건들이 쓸모가 있거든요. 그 시간에 사람들은 음악을 크게 틀고 차 경적을 울리거나 나팔을 불고 폭죽을 터트리는데요. 이는 새해 전야에 큰 소리를 내면 불행과 악령을 쫓아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클락의 쇼핑몰 SM까지 오게 되었네요. 12월이면 크리스마스 시즌이 절정에 달해 어느 쇼핑몰을 가든 사람으로 북적대기 마련인데 이날은 새해를 앞두고 다들 가족들과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인지 건물 내부가 꽤나 한산했습니다. 그러나 쇼핑몰을 돌아다니보면 어느 한 가게 앞에 유난히 긴 줄이 서있는 걸 볼 수 있었는데요. 자그마치 백미터는 되보이는 긴 줄을 서는 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필리핀식 떡 케이크 “비코(Biko)”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새해에 이곳 사람들은 불행을 몰아내고 행운을 얻기 위해 끈적끈적한 식감의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어서 이런 떡과 같은 음식을 새해 전에 미리 사서 집안에 가져다 놓습니다. 또한 이렇게 좋은 의미를 가진 떡이기에 사람들은 떡을 사서 새해 전날에 이웃들에게 돌리기도 합니다.

저녁 5시, 6시경에 방문한 현지의 한 가정집 모습입니다. 먼저 가족들이 한데 모여 이른 저녁 식사를 식사를 합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밥을 많이 먹지 말고 적당히 양 것 먹어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해가 되는 다음날 밤 12시가 되면 이곳에선 다시 식사를 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지요. 새해에 먹을 식사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사람들은 새해 자정까지 깨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가족들과 모여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떡과 빵을 챙겨 이웃집에 가서 전달하며 서로 덕담을 주고 받습니다.

저녁을 먹은 뒤 집안을 둘러보니 한 탁자 위에 다양하고 많은 과일들이 놓여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새해 에 필리핀 사람들은 포도나 오렌지, 사과 등 12가지의 둥근 과일을 집 안에 두고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는 필리핀을 식민 통치 했던 스페인 문화의 영향이자 둥근 과일이 옛날의 금화와 은화를 닮아 집안에 재물복을 불러온단 믿음 때문입니다.

또 다른 곳엔 바구니에 동전이 가득 담겨있고 그 위에 지폐 다발이 놓여 있습니다. 새해 자정이 되면 이 동전들은 집안에 뿌려질 예정인데요. 이 역시 재물에 대한 믿음 때문으로 보입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 집니다. 귀여운 부티키(필리핀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마뱀. 하우스 게코) 한 마리도 곧 도래할 새해를 함께 기다리나 봅니다.

사진에서 같이 집안 가족들이 서로에게 주기 위해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집안에 쌓아 놓은 선물들은 새해가 되면 전달됩니다. 이때 이들은 서로의 선물을 주고 받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곧 새해가 시작될 것을 알리는 카운터가 띄어져 있습니다. 티비 속 카운터가 0을 가리키자마자 밖에서는 폭죽, 고함 소리 등 새해가 된 것을 축하하는 온갖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소리가 워낙 커서 놀라 저도 곧 바로 밖으로 나가보았는데요.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가정에 좋은 기운을 불러 놓기 위해 집안에 불이란 불은 다 켜고 온 방문을 열어놓습니다. 그래서 집밖에 나오면 늦은 시간에도 모든 집들이 환하게 불을 밝혀 놓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밤 12시 직후 한 가정집 밖 모습
장식용 등불 파롤(Parol)로 치장한 집 앞에서 음악을 틀고 춤추는 사람들
화약 연기와 냄새로 가득 찬 골목

새해의 밤 12시가 되자마자 폭죽이 터지고 그 뒤로 30분간은 폭죽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네요. 폭죽을 얼마나 많이 쏘는지 곧이어 화약 연기와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워서 앞이 잘 안보일 지경입니다. 폭죽 소리 뿐만 아니라 차 경적, 음악, 가라오케 노랫소리, 고함 등 온갖 소리가 들리는데 이렇게 난리일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 폭죽이 조금씩 터질 즈음엔 집집마다 가라오케를 틀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데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도 춤을 못추는 사람도 거의 없네요. 대부분이 노래든 춤이든 다 잘 합니다. 한국에 비하면 이곳 사람들은 흥도 끼도 넘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곳곳에서 터지는 폭죽도 위험하지만 신난 사람들이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빠르게 몰고 다녀 사건 사고가 다수 발생하니 밖을 돌아다닐 땐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신년 새벽에 다 같이 모여 먹는 화려한 식사

새벽 1시 쯤 되어 폭죽 소리가 잦아들 무렵 온 가족이 식탁에 모여 새해 첫 식사를 합니다. 사람들은 이때 먹는 식사에 엄청난 공을 들이는데요. 사진으로만 봐도 먹음직스러운 멋진 음식들이 상다리 부러지게 식탁에 오릅니다.

식사를 마친 후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 각자가 준비한 선물을 서로에게 주고 받는데요. 이어서 받은 선물들을 돌아가며 공개하는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선물을 준비하신 분의 유머와 센스가 담긴 재치 있는 선물이 나오면 다들 재미있어 했고 받는이를 위한 주는이의 사려 깊은 뜻에서 준비한 선물이 나오면 모두가 감동했네요. 어찌나 하하호호 웃었는지 나중엔 입이 아플 정도더라고요. 저 뿐만 아니라 그날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선물을 주고 받으며 신나게 담소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어느덧 새벽 두 세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가족들은 서로에게 밤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로 가면서 새해 의식이 마무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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